포스테키안

2020 봄호 / 문화 거리를 걷다

2020-06-01 18

문화 거리를 걷다 / 성대모사 장인에서 배우까지

고등학교 때까지의 저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습니다. 칭찬을 들으면 주로 차분하다, 진지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었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주저하던 저는 자신을 ‘내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몇백 명을 앞에 둔 대강당에서 마이크도 없이 호텔 지배인 연기를 하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죠.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변화는 무료한 고3 막바지에 시작되었습니다. 축제 전야제 공연 팀을 모집하고 있었고, 학교생활 중 기억나는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이대로 3년을 끝내기 아쉬웠습니다. 뭔가 재밌는 걸 해 보자는 생각에 평소에 선생님 성대모사를 하던 경험으로 물리 수업을 성대모사로 재현하는 코미디극을 꾸몄습니다. 충동적으로 계획해서 엉성했지만, 관객들이 제 등장과 대사에 웃어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배우로 인생 첫 공연을 짧게나마 해 본 셈인데, 이때 감정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막바지를 불태웠던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포스텍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만큼은 공부 외의 도전을 해 보자는 목표를 가지고 연극 동아리 ADLIB(애드립)에 들어갔습니다. 1학기에는 선배들과 팀으로 나뉘어 10분~20분의 내부공연, 2학기에는 2시간짜리 정기공연을 준비했고 내부공연에서는 반전 있는 소개팅남, 정기공연에서는 아부하는 호텔 지배인 역을 맡았습니다. 사실 성대모사를 할 때는 이미 친구들 반응을 봐서 잘할 자신이 있었고 대사를 직접 작성했기에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연극에서는 배역이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주어졌고, 관객들도 모르는 사람들임을 생각하니까 막막했습니다.

흔히들 하는 오해 중에 연기는 대사 암기가 전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기공연 준비 3달 중 대사는 첫 2주 내로 외워야 했고 이후는 표정, 말투, 동선, 손동작, 시선 처리 등 비언어적인 부분을 연습했습니다. 이들이 감정 전달의 주역이기도 하고, 연습을 위해 연기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서 연출진의 끊임없는 피드백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씬을 완성했다 해도 말과 행동을 완벽하게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컨디션도 날마다 달라 몸에 익을 때까지 수십 번 반복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2학기 내내 주 6일, 밤 10시부터 새벽 2시 이후까지 연습을 진행해 육체적으로 피로가 쌓였습니다. 아무리 연습해도 고쳐지지 않던 발음과 손동작 때문에 새벽에 방에서 회의감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전에 느꼈던 공연에 대한 열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쌓여 왔던 스트레스는 공연 당일, 시작 직전 마지막 음악이 끝날 때 녹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안경을 쓰지 않아 연극 도중 관객의 반응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사 하나하나마다 터지던 웃음소리는 똑똑히 들렸고, 막이 내리며 인사할 때 대강당을 울리는 박수와 함성에 짜릿함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이래서 배우 하는구나….’

처음에 성대모사를 계획할 때와 애드립 입부를 고민할 때 좀 부끄럽다, 반응이 싸하면 어떡하지? 등 부정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이미지와 다르기도 했고, 실수에 받을 시선이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를 도와준 문장이 있습니다.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 성공, 실패 모두 경험이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승부수를 두었고, 다행히 값진 경험이 되었습니다. 사실 연극 이후에도 말수가 적던 원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농담과 같이 끼를 발산할 작은 기회라도 마주한다면, 이젠 꾹 참지 않고 던져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서도 이미지와 주위 시선 때문에 끼를 숨기는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은 표출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거든요.

무은재학부 19학번 박경수